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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별, 기록/Tagebuch

SBS [송포유], 사회가 골머리 앓던 문제에 대안을 제시한 프로그램

SBS 에서 방영한 [송포유], 마지막 방영분인 제 3회는 기어코 본방사수하여 시청률 상승에 가담하였다.


방송에 출연한 아이들로 인해 상처받았던 피해자들, 폴란드까지 가서도 클럽을 드나든 아이들의 행동들, 일진미화 등의 소재로 논란이 많은 현실이다. 


그렇지만, 어른으로서의 내 시각은 다르다.


프로그램에 대한 비난이 그치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TV에 출연한 '아이들' 에게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100일 동안 변화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먼저 우리 어른들 스스로 자문해보자. 

과연 나는 100일이라는 시간동안 그 어떤 특별한 경험을 통해 진정 변화할 수 있을까?


삶은 그저 한 순간의 '점'이 아니다.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고, 관성에 의해, 습관에 의해 살아가게 마련이다.

사람은 한 번에 변해 갑자기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다.

매일 조금씩 변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장이다.


천의 하나, 만의 하나, 변화했다 치더라도

그들이 물정 모르고 저질렀던 과거의 잘못들, 그로 인해 받은 상처들이 사라질 종류의 것인가.


말도 안된다.


평생 한이 될 만 한 죄만은 짓지 않기를, 너무 큰 실수는 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아이들을 나무라고 달래고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피해자들이 스스로 용서하지 않는 이상, 용서받을 길은 전무하기 때문에 말이다. 상대방으로부터 용서를 받아도, 자기 스스로를 용서하기는 몇 백 배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잠시 잠깐 아이들이 변화한 것처럼 보여도, 완전히, 앞으로도 쭈욱 멋지게만 살 것이라고 안심하는 것은 금물이라고 생각된다.


아이들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씁슬하지만) 비난할 일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이다.


[송포유] 3부작에서 정작 바라봐야 하는 것은 성지고와 과기고의 아이들이 아니다.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고, 혼내고, 관심을 가지고, 눈물 흘렸던 [송포유] 제작진들, 

지휘자였던 이승철씨와 엄정화씨.


그 '어른들'의 모습을 바라봐야만 한다.


이승철씨가 방송 중에 했던 말에 공감한다.

"이 아이들은 오히려 너무 받아주고, 달래주는 것들에 익숙해져 있다."


청소년 문제는 

모두 문제다, 문제다, 하면서 비난하기나 했지,

그들이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고, 성장시키기 위해 함께 아프려고 하지 않았던 어른들이 

다함께 만들고 키운 사회문제이다. 


온 사회가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교사다, 부모다, 책임을 미루기만 했지,

그들의 눈조차 무서워 마주치고 싶어하지 않았던 어른들이

협력하여 방치해 두었던 심각한 사회문제이다.


[송포유] 제작진들이 결코 아이들에게 면죄부를 주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을 거다.

이기적이고 제 멋대로인 요즘의 사춘기 아이들과 한 시라도 함께 지내본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다.

그들을 마냥 사랑하기란 정~말 정~말~ 엄청나게 어렵다는 사실 말이다.

면죄부는 커녕, 내가 직접 확 패주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많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가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면, [송포유]의 제작진들이 고민했을 법한 내용들이 떠오른다.


사람은 공짜로 성장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눈물, 누군가의 희생, 헌신을 통해 성장한다.


그리고 그런 값을 치르는 것은 '사랑'이다.


이 프로그램은,

앞으로 어떤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지에 대해 철저하게 고뇌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 아이들이 우리의 미래가 될 것이다.

그들이 알아서 제멋대로 길을 찾기를 바라는지-

아니면 그래도 조금은 먼저 산 어른들의 지혜를 배워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지-


그렇다면 이들을 사랑해야 하는가? 아니면, 방치해야 하는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을 욕하듯이 아이들을 욕하고 죗값을 치르도록 하는 것이 궁극적인 대안이 되기는 어렵다.

(물론 죄를 묻지 않는 것 또한 대안이 아니다.)


성인이 되기 전에,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나마 큰 청소년기에,

더 늦기 전에 '어른들이' 아이들을 바라보고 용기내어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


이러한 결단을, 하나의 대안으로써 우리 사회에 제시했다고 본다.


한순간에 바뀌지는 않지만,

청소년기의 특별한 경험은 감사하게도 한 사람의 인생 전체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때 홀로 나를 지지해주던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살아가면서 한계를 만날 때마다,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힘이 있다.


TV에 나온 아이들은 그저 하나의 sample 일 뿐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들은 지금도 우리 동네 구석구석에서 갈 길을 몰라 헤매는 무수한 아이들을 대표해서 TV에 나왔을 뿐이다.

일진을 미화했다는데, 사실 어른들이 보기엔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는 그들의 평소 모습이 전혀 멋지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창피한 모습 보이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아이들의 연약한 모습들이 그대로 방송 전파를 탔다.


다만 멋있고 감동적이었던 것은,

그들에게 어떻게든 하나의 목소리를 내게 하려고, 조금이라도 변화한 모습을 발견해 보려고 처절하게 노력하고 땀과 눈물을 쏟아낸 어른들이다.

방송 내용 중 과장되고 미화된 부분이 있다면, 그것 또한 우리가 바라는 희망에 대한 반영이라고 생각해보게 된다.


공중파를 탄 아이들을 심판하는 것은 시청자인 우리의 몫이 아니며,

어른으로서,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 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당면한 숙제이자, 책임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