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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별, 세계여행/2015 두근두근 세이셸

나는 중국인일까? | 한국인으로서 세이셸을 여행한다는 것



나는 중국인일까? | 한국인으로서 세이셸을 여행한다는 것




한국인은 거의 만날 수 없었다. 세이셸에서 지내는 7일 간, 에필리아 리조트에서, 프랄린(Praslin)의 버스에서, 라 디그(La digue) 해변에서 신혼여행 온 것으로 보이는 커플을 딱 세 번 정도 마주쳤을 뿐이다. 비록 그들이 모두 싸우거나 울고 있어서 '어머, 한국인이신가 봐요?!' 하고 반갑게 인사도 못했지만 말이다. (신혼여행 가서 왜 그렇게들 싸우지... 그 아름다운 곳에서 울며불며 싸우는 장면은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웠다.)


한국인이 서양인들로 가득한 나라를 여행한다는 것은 중국인이 될 각오를 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중국을 좋아하고, 중국어를 좀 할 줄 알아서 덜 억울하기는 했다. 그러나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잊을만하면 한 번 씩 중국인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할 일이 생기곤 했으니, 함께 있던 신랑이 배꼽을 쥐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 1


리조트에 체크인할 때였다. 낑낑거리며 짐을 들고 프런트에 가서 예약 이름을 대고, 여권을 냈다. 여권을 보고도 아시아인은 무조건 중국인으로 분류되는 것인지, 우리에게 배정된 안내 직원은 중국 남방에서 얼마 전에 세이셸로 온 젊은이였다. 영어는 더듬거리며 하는 수준이었다. 유창하게 리조트를 소개해 주어야 할 직원이 영어를 못해 버벅거리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중국어로 질문을 하고 답변을 받기 시작했다. 


중국어를 할 수 있게 된 그는 신이 났나보다. 자신의 고향 이야기를 시작했고, 세이셸까지 와서 이렇게 일하게 된 스토리까지 술술 풀어놓았다. 나는 어느새 그 내용을 신랑에게 순차통역해 주면서 그가 안내하는 리조트의 서비스까지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신랑은 나에게 질문했고, 나는 다시 중국인 직원에게 물어보고 답변해 주었다. 20여 시간의 비행을 막 마치고 세이셸에 입국하여 통역사가 된 것이다. 이 곳에서 전공을 살릴 일이 생길 줄이야.



#. 2


세이셸에서의 마지막 날 저녁 식사는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하고 싶었다. 앨리슨에게 소개를 받아 보발롱 해변(Beau Vallon Beach_마헤섬의 가장 유명하고 큰 해변)에 있는 라 플랏지(LA PLAGE)라는 식당에 찾아가기로 했다. 라 플랏지에서도 나는 잠시 중국인이 되었다.


꼬불거리는 산길을 넘어 도착한 라 플랏지는 세이셸 여행을 정리하기에 딱 좋은 식당이었다. 앨리슨의 친구인 그렉 사장님이 감사하게도 해변과 가장 가까운 곳에 우리 자리를 잡아 두어, 해 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맛도 일품이었다.



  
  












메뉴를 골라 주문을 넣어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식당 안쪽에 앉아 있던 여자분이 메뉴판을 들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중국어를 시작했다.

"不好意思...... 실례하지만 제가 영어를 전혀 못해서 그러는데.. 메뉴 설명을 좀 해 주실 수 있나요?"


신혼여행을 온 중국인 신혼부부였다. 같은 중국인으로 보이는 내가 메뉴를 잘 시키는 것을 보고는 용기 내어 나에게 다가와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하필 메뉴판에 그림도 없는 터였다. 그렉 사장님은 옆에 와서 내가 잘 모르는 메뉴를 성심껏 영어로 설명해 주었고, 나도 최선을 다해 중국어로 설명을 옮겨 주었다. 우리가 어떤 음식을 시켰는지도 이야기해 주었다. 


이 중국인 신혼부부가 저녁식사를 성공적으로 주문해서 먹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중국어를 배운 것은 참 잘 한 일이라고. 세상의 많은 언어 중에 내가 보이는 모습과 비슷한 언어를 배운 것은 어쩌면 탁월했는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이들의 한 끼가 마치 내 입을 통해 만들어진 것 같아서 행복해졌다.














#. 3


마헤 섬의 수도인 빅토리아는 아주 작아서, 몇 번만 돌아다니다 보면 기억에 남는 분수나 조각상, 시계탑을 기준으로 길을 찾을 수 있다. 환전을 하러 빅토리아에 있는 은행을 돌아다니다가 환율을 가장 좋게 쳐주는 환전센터를 찾았다. 


환전 신청서를 적어 냈더니 여권을 보여달라는데, 앗! 깜빡 잊고 여권을 두고 와 버렸다. 여권을 가지러 숙소에 다녀오려면 또 산을 넘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방법이 없겠느냐 물었더니 아무런 신분증이라도 있으면 해 주겠다고 했다. 다행히 지갑에 주민등록증이 있어 보여주었다.


잠시 후 유로화를 세이셸 루피로 환전하고 직원에게서 받은 영수증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국적: 중국"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Nationality : CHINA


"아.. 저 한국인인데요." 하며, 남은 달러도 세이셸 루피로 바꿔달라고 했다. 다시 한 번 신청서와 달러를 건네며, '이번에는 한국인이라고 적어 주겠지.'라고 생각했다.


Nationality : NORTH KOREA


그러나 인쇄되어 나온 영수증에는 "국적: 북한 사람"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어쩌면, 중국인이나 북한 사람일 수는 있으나, 남한 사람은 아니었나 보다. 남편을 따라서 '하하' 웃을 뿐이다.




세이셸 지도는 정확하게 그려져 있지 않다. 지도를 보고 대충의 위치를 확인할 뿐, 실제로 가서 목적지가 없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그 근처를 찾아보면 된다. 우리도 리조트에서 지도를 펴 목적지의 위치를 대략 확인하고, 핸드폰 GPS를 내비게이션 삼아 산을 넘곤 했다. 


그것은 마치 나의 국적이 한국이지만, 어쩔 땐 그냥 아시아인일 뿐이기도 하고, 가끔은 중국인이 되기도 하면서 뭐 그렇게 지구인으로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세이셸, 마헤섬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