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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별, 세계여행/2015 두근두근 세이셸

셀프의 시대 | 우리의 여행은 우리가 만든다

바야흐로 셀프의 시대, 


거의 모든 정보는 오픈되어 있다. 덕분에 생애 첫 배낭여행을 떠나던 어리바리 스물한 살의 나와는 달리 농염해진.. 아니, 노련해진(!) 여행 경력자로서의 넘치는 자신감으로 결혼이라는 여행에 임하게 되었다. 여행을 다녀본 사람들은 안다. 여행은 떠난 자의 것이 아니라 준비하고 만들었던 사람의 것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연히 알게 된 곳에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하고, 지도를 펴 목적지를 찾아보고, 현지 맛집 정보를 찾기 시작하는 바로 그때부터 진짜 여행은 시작된다. 이 과정을 웨딩 플래너 혹은 여행사의 기획자들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기대감을 가득 담아,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되도록 우리 손으로 만들어 가기로 했다.


첫 번째 시도는 셀프 웨딩 촬영이었다. 


많은 이들이 시도하고 있는 일이었고, 우리도 정보의 바다에서 필요한 만큼의 정보를 한 바가지 즐겁게 퍼 올려 우리만의 이야기로 승화시켰다. 사진을 좋아하는 나의 친구 한 명과 비를 좋아하는 신랑의 친구 한 명을 끌어들였다. 십 만원 짜리 드레스를 한 벌 사고, 고속터미널 꽃 시장에서 조화로 만든 부케를 준비했다. 신랑이 예전에 친구의 축가를 불러주고 선물 받았다는 하늘색 재킷도 챙겨갔다. 소품으로 만들어 들고 가던 우드락은 제주도에 도착한 비행기에서 내리며 마주친 외국인이 실수로 밟아 망가져버렸지만, 드레스를 입고 백사장에서 춤을 추는 일이, 비 내리는 사려니 숲길에서 우산을 쓰고 키스하는 일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두 번째 시도는 셀프 인테리어. 


셀프 인테리어에 도전한 후로 하루가 멀다 하고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졌다. 운 좋게 적당한 집을 구했는데, 멍청하게 생긴 주인집 진돗개가 내 손바닥을 물었다. 난생처음 생 살을 꿰매면서 지옥의 맛을 봤다. 거실 한쪽 벽면 도배를 맡은 어르신들께서는 멀쩡한 의자를 부셔버렸다. 하도 이 일 저 일 참견을 해서 우리가 오지랖 아저씨라 부르는 도배 책임자 분이 있었다. 이 아저씨는 우리가 애써 고른 손잡이와 콘센트 커버를 손수 교체해 주시겠다며 새 제품에 들어있는 부품들을 쓰레기로 버리거나 새로 바른 벽지를 구석구석 꼼꼼히 찢어먹었다. 오지랖 아저씨는 우리가 발품 팔아 구입해 온 조명을 굳이 교체해 주겠다고 팔을 걷어붙이셨는데,  설치 설명서를 무시하고 힘으로 연결하려다 부품들을 부러뜨리고 말았다. 도저히 안된다며 불량품이라는 말과 함께 천정에 전선을 매달아놓은 채로 포기해 버렸다. 신랑은 오지랖 아저씨가 벌려놓은 것들을 다 뜯어내고 설명서대로 찬찬히 재설치를 했다. 오지랖 아저씨의 아이디어로 계획에 없던 천장 도배까지 덤으로 하게 되었는데, 이건 성공적이었다. 비록 조명 설치하시다가 본인이 찢어버린 도배지를 가리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지만 말이다. 챙길 것이 많아도 즐거웠던 셀프 웨딩 촬영과는 달리 골치 아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곧 이사 갈 친정 엄마 집의 도어록을 우리 신혼집으로 이전 설치하기로 했다. 철물점 아저씨께 맡겨두고 출근을 했는데, 퇴근 후 확인해 보니 15도 각도로 뉘어서 설치가 되어 있었다. 현장에 있었던 엄마에게 여쭤보니, 이게 최선이었단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도어록의 각도였는데, 나 혼자만 놀라 펄쩍 뛰고 있었다.


황당하게 기울여진 채 설치되었던 우리집 도어록

털썩-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내 눈에만 이상해 보이나? 전문가라는 사람의 눈에 이게 정상으로 보이는 거야, 정말? 세상에 누굴 믿고 살아야 하나? 큰 일부터 작은 일까지 빠뜨리지 않고 일일이 참견해야 그나마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모습과 비슷하게나마 만들 수 있는 현실 앞에서 끝없는 무기력감이 밀려왔다. 다음날 출근길에 따지며 전화를 걸었을 때, 철물점 아저씨로부터 '여자가 아침부터 재수없게 전화를 해서..!!'라는 고함을 들으며 전화가 끊기자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 그건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내가 '이 정도는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매너, 개념, 가치가 세상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공유되는 것이라고 여겨 왔다. 그러나 나와 다른 매너, 나와 다른 개념, 나와 다른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계속 만나다 보니 완전히 지쳐버렸다. 대부분은 비슷하고 어느 정도 용인할 수 있을 만큼만 다양한 사람들이 내 주위에 함께 살고 있다고 믿어왔다. 이제는 생각은 반대로 바뀌었다. 오히려 내가 이해할 수도 없고, 나를 이해해 주지도 않는 사람들이 태반이고, 어쩌다 운이 매우 좋으면 서로를 용인할 수 있는 만큼 괜찮은 인연을 만나기도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셀프의 시대'란 이런 것이다. 보정을 마친 웨딩 사진만큼 모든 과정이 완벽하게 아름답지 않다. 밤중에 이불로 발을 몇 번씩 걷어찰 만큼 황당하고 억울한 일이 벌어지는 무서운 세상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파워포인트의 눈금 간격을 나누어 집 도면을 그려내던 나의 의욕이 서서히 빛을 잃고 있을 때, 앞으로 아무것도 셀프로 하고 싶지 않아지기 시작할 즈음, 시나브로 완성되어 가는 우리 집을 보게 된다.

 

세상에.. 너무 멋지잖아.


파워포인트에 눈금을 나눠 그린 이 도면은 셀프 인테리어에 대한 첫 의욕을 여실히 보여준다.


반전이다. 다시 힘이 난다. 원하고 그리던 모습 그대로, 아니 훨씬 멋진 작품이 만들어졌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사랑스러운 집이 만들어졌다. TV에도, 인테리어 책에도, 제이쓴의 블로그에서도 본 적이 없는 집이다. 스피커 설치 위치에 대한 의견이 달라 다투기는 했지만 결국 합의를 이뤄냈고, 우리에게 최적화된 스마트하고 예술적인 집이 탄생했다.


감히 정의컨데, 바야흐로 셀프의 시대이다. 우리 결혼은 우리가 준비한다. 우리 집은 우리가 꾸민다. 귀찮고 어려운 일이 산더미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우리만의 이야기가 쌓이면서 삶이 풍성해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혼여행도 셀프로 준비할 것이다.